도박중독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사람의 행실, 특히 나쁜 행동에 휩쓸릴 때 무엇으로부터 ‘물들어’ 그렇게 되었다고 얘기한다. 도벽이 있거나 잘 싸우거나, 부랑아처럼 행동할 때 ‘나쁜 물이 들었다’고 하며, 마약이나, 술, 게임, 도박 등 정신질환과 관련되는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물들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행동이나 장애 등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나쁜 것’에 연루될 때에 ‘물든다’라는 표현을 가져다 쓴다.
어느 날 아저씨뻘 고향 친구가 부인과 함께 내 사무실을 찾겠다고 연락해왔다. 당시 내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도박중독자’ 치유였으므로, 집안에 큰 사달이 났음을 직감했다. 대기업 계열 건설사에 다니는 아들이 엄마에게 ‘아빠에겐 비밀로 해달라’며, 돈 2천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단다. 엄마는 남편 몰래 이리저리 융통하여 건네주면서 용처를 물으니, ‘스포츠 토토’를 하다 돈을 잃었단다. 어떻게 ‘복권’ 비슷한 도박을 하는데, 그렇게 큰돈을 잃을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정부 공공기관에서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스포츠 토토는 베팅 횟수나 금액에 제한이 있고, 지정된 곳에서만 할 수 있어서 단기간에 그렇게 큰돈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불법 스포츠도박은 제어장치가 없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어 위험이 훨씬 크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스포츠 경기를 대상으로 24시간 베팅을 유혹하는 사이트들이 성업 중이어서,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2천만 원을 가져간 후 얼마 안 있어 아들이 다시 8천만 원을 갚지 않으면 직장에서 도박 사실이 알려져 해고될 판이라면서 빨리 변제해야 한다고 간청했다.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동료는 물론, 직속 상사들로부터 수백만 원씩을 빌렸다.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알리고 집을 담보로 돈을 구해 건네주고 나를 찾았다. 나쁜 물이 들어도 단단히 든 것이다.
도박중독자 :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아픈 사람
도박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 없이 베팅을 할 수 있고, 바로 바로 돈을 따고 잃는 ‘즉각적 보상’이 주어진다. 그래서 사람들, 특히 인지능력이 덜 성숙한 청소년들이 쉽게 도박에 ‘물들게’ 된다. 도박중독은 뇌 질환으로, 몸과 마음으로부터 ‘도박중독이라는 나쁜 물’ 빼기가 그만큼 어렵다. 또 가족질병이어서 온 가족이 함께 치료를 받아야 하고, 만성질환 이어서 지속적인 치유가 필요하다.
도박이라는 나쁜 물에 물들게 되는 심리상태를 살펴보면, 도박의 승패는 전적으로 우연에 좌우됨에도 노름꾼들은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진 경우 조금 더 하면 딸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 어느 쪽에 자리하면, 무엇을 소지하면 이긴다는 등 말 같지 않은 미신이나 의식을 신봉한다.
거기에 기름을 붓는 것이 바로 도박 빚을 갚아주는 것이다. 가족 간 금전대차 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특히 더 심한데, 100명에 99명은 ‘과부 땡빚을 내서라도’ 자식이나 남편의 도박 빚을 갚는다. 그래서 도박자는 물론 온 가족이 함께 오랫동안 ‘수렁’에서 허우적댄다.
도박중독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가능한 다양한 불법도박이 횡행하고 있다. 특히 스포츠 관련 도박이 문제로, 선수나 팀의 승패나 획득점수는 선수 개개인의 컨디션, 날씨, 상대의 실력과 정신력 등 다양한 변인에 좌우된다. 해당 종목의 감독이나 해설자 등 전문직업인도 결과를 맞히지 못하는 것을 일반인이 맞추는 것은 ‘우연’에 가까울 뿐이다. 스포츠도박자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열정적으로 스포츠에 ‘물들어 있다’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들은 도박중독이라는 나쁜 질병에 ‘절어’ 있는 상태다.
법은 범죄를 따라갈 수 없다. 뒷북을 치고 있다. 문제는 사기나 불법으로라도 돈을 벌어야 하겠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는 사회현상이다. 탐욕에 혈안이 된 사업자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일확천금의 기회’라고 무차별적으로 접근한다. 더 큰 문제는 ‘스포츠라는 탈을 쓴 도박이 청소년들의 의식을 물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도박은 한바탕 지나가는 광풍이 아니라,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거나 기술발전에 따라 신종도박들이 곳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
도박중독은 1970년대부터 국제 의학계에서 ‘충동 조절이 안 되는 정신질환’의 하나로 공인되었다. 보건기구(WHO)는 2019년 ‘병명’을 ‘도박장애(Gambling Disorder)’로 고쳤다. ‘도박 행동으로 인해 본인의 교육, 직업 등의 일상생활과 가족, 사회 분야에 상당한 손상을 가져다 주어 아주 심각한 상황에 처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도박장애 진단기준 ICD11 6C70).
감기 환자에게 ‘왜 감기 걸렸냐?’ 라고 묻는 부모나 선생님은 없다. 하지만 도박이란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은 ‘아픈 사람’이다. 아프면 병원을 찾듯이 전문기관을 찾아야 하며, 혼자서 치유가 힘들므로 가족과 사회가 나서야 한다. 도박에 물든 중독자에게 돈을 대 주는 것은 환자에게 ‘환각제’를 쥐여주는 것과 같다. 도박중독이라는 나쁜 물을 빼기 위해서는 상담 기관이나 전문병원, 익명의 도박자 모임(GA)을 찾아야 한다. 도박은 결코 ‘물들어서는 안 될’ 패가망신에 이르는 질병임을 인식하는 것이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