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힘내라’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었 다. 이미 우리는 과도할 정도로 힘내서 살 고 있다. 24시간 편의점과 상점, 샛별과 총 알 배송이 존재하는 이 나라에서 힘내는 기술은 이미 많이 축적되어 있고, 우리의 내면에 정착돼 있다. 나를 포함해 주위를 보면 가장 못하는 게 ‘죄책감 없이, 불안감 없이 쉬는 일’처 럼 느껴지기도 한다. ‘화이팅’이라는 말도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다. 정말 힘들 때 듣 는 ‘힘내라’라는 말이 폭력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힘 빼’라는 말이 필요할 때도 많다. 그래서 사 람들에게 이런 저런 문장을 처방하고 난 후, 라디오가 끝날 즈음 가장 많이 했던 말 이 바로 이 말이었다.
“머그컵 말고, 가장 예쁜 손님용 찻잔을 꺼내세요.
나를 손님을 접대하는 것처럼 극진히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차 한 잔을 우려보세요.
밤이라면 창문을 열고 하늘의 달을 보면 좋겠습니다.
아마 눈을 감으면 평소에는 듣지 못했던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어요.”
심야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다보 면 스스로를 미워해서 나를 진심으로 사 랑하고 싶다는 말, 부정적인 자신을 바꿔 긍정적으로 살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듣는 다. 하지만 마음을 금세 바꾸는 건 성격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해도 마치 ‘화를 참는 일’처 럼 내부에선 화가 고스란히 쌓이기 때문이 다. 결국 ‘화를 참는 사람’이 아니라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게 불교에서 말하 는 소위 ‘깨달음’이라는 건데, 쉽지 않은 일 이다. 물론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 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낙천성과 낙관성을 혼돈한 다. 낙천성과 낙관성은 다르다. 낙천성은 운 좋게 타고나지만, 낙관성은 훈련으로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스트레스 를 잘 받지 않는 낙천성이 아니라, 어떤 스 트레스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낙관 성, 우리가 평생 익혀야 할 것은 바로 낙관 성이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매 순 간 살아 있을 수 있다. 훈련으로 가능한 낙 관성을 기른다면 지금과는 또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괴로워도 노을을 보면 너무 행복해져요."
어린 시절 앤이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 를 보며 ‘제인’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 “생 각대로 되지 않는 건 멋진 일이에요. 생각 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는 걸요!”라고 외칠 때, 나는 이 작은 아이에게서 반짝이는 삶 의 비밀을 엿보았다. 고아였던 자신의 과 거나 놀림 대상인 빨강머리가 변하지 않 을 것 같다는 미래의 두려움에도 이 아이 가 얼마나 빨리 ‘현재’의 기쁨으로 자신을 돌려세우는지를 알고 더 그랬다. 앤의 눈으로 보면 마흔 여섯 살 나이도 ‘내 인생에서 가장 어린 순간’이다. 내가 쉰 여덟이 되거나 여든이 된다 해도 마찬가지 다. 우리가 숨 쉬는 지금이 내 인생의 가장 어린 순간이라고 생각하는 건 마인드 컨 트롤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며칠간의 마감과 스트레스로 유독 주름 살이 깊어 보였던 어느 날, 나는 이 말을 자 주 기억한다.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어 린 순간이다’라는 말.
"여름은 더워서, 겨울은 추워서 좋아합니다."
몇 년 전, 법륜 스님의 법문을 들었을 때 이 말에 받은 충격이 컸다. 겨울이 추워서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내 자신이 떠올 랐기 때문이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라는 말은 얼핏 취향 없는 사람처럼 보일 법 하지만, 나는 이제 그 무미무취의 아름 다움을 알만한 나이에 다다랐다. 초당 순 두부의 담백한 맛, 평양냉면의 밍밍한 맛 처럼 말이다. 똑같은 이유를 두고 어떤 사람은 좋은 면을, 어떤 사람은 나쁜 면을 본다. 컵에 물 이 반이나 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반 밖에 차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을은 단풍지 고, 봄에는 꽃이 피니 이 또한 아름다운 계 절이다. 매일 매일이 소중하고 좋다고 생 각하는 사람의 삶이 겨울은 추워서, 여름 은 더워서 싫다고 말한 사람과 같을 리 없 다. 앤이 행복한 건 딱 그 이유 하나다.
살다보면 예상치 못한 큰 어려움들이 쉼 없이 생긴다. 그게 어디 개인사뿐일 까. 미세먼지가 많았던 것도 꽤 힘들었는 데, 코로나19 이후 마스크는 이제 생존 용 품에 가까워졌다. 코로나 확진자 숫자가 400명에 육박하던 날, 간신히 추스렸던 마 음이 다시 시무룩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럴 때 자주 생각하는 앤의 말이 있다.
"내일은 아무 것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라고 생각하면 기쁘지 않아요? "
내일을 내일이라 말하면 내일 이외의 의 미를 발견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내일을 아무 것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라고 생각 하면, 우리의 삶을 다시 ‘아침’이라는 말로 ‘리셋’할 수 있다. 그러면 어쩐지 마음 깊 은 곳에 있던 희망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조금씩 살아가는 거다. 대단한 의미가 없어도 마음이 뭉클할 정도로 감 동받거나 행복하지 않아도 삶은 흘러간 다. 그런 삶도 나쁘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 렇게 말해보고 싶다. 행복과 불행 사이에 ‘다행’도 있다는 걸 잊지 말자고. 처음으로 마스크를 끼고 방송을 했던 날이 기억난다. 처음 만나 학번을 묻는 것 처럼 라디오 스튜디오에 들어가자마자 DJ 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KF 마스크인가요?" "네. 불안해서 덴탈 마스크는 못 쓰겠더라고요." "94?" "네. 학번 말하는 것 같네요.(하하) "
마스크를 쓴 채 방송을 하는 이 기념비 적인 상황을 사진으로 남겼다. 훗날 이 사 진을 본다면 지금의 상황을 조금은 담담 해진 얼굴로 얘기할 수 있을 거라 위안하 면서 말이다. 이 모든 일이 유쾌하진 않지만, 살아온 날 덕분에 이제 짜증 아닌 헛웃음이 난다 는 걸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젠 나도 행복을 ‘괴로움이 없는 상태’ 라 조금씩 바꿔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그래서 요즘 내 출근길 주문은 이것이다. 행복과 불행 사이에 다행도 있다는 걸 기 억하는 것.
내일을 내일이라 말하면 내일 이외의 의미를 발견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내일을 아무 것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라고 생각하면,
우리의 삶을 다시 ‘아침’이라는 말로 ‘리셋’할 수 있다.
- 백영옥 작가는
- 「안녕, 나의 빨간머리 앤」,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의 저자이며 10여 권의 소설, 산문집을 펴냈고, 신문과 잡지 등에도 책과 영화에 대한 폭넓은 글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각종 라디오와 EBS ‘발견의 기쁨, 동네 책방’에서 골목을 여행하며 동네 책방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