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젓한 영랑호에서 되찾은 효심 깊은 딸
전날 새벽에 내린 비 덕분에 영랑호의 물결이 반짝반짝 빛을 낸다. 호젓한 영랑호 둘레길을 걷노라니, 이따금 부는 상쾌한 산들바람이 반갑다. 10년 동안 늘 가족과의 여행을 생각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는데, 꿈에 그리던 여행을 오늘에서야 오게 됐다. 모든 자식이 귀하고 예쁜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만, 1남 5녀 중 둘째 딸인 수진 씨는 유독 예쁜 손가락이었다. 아버지는 장에 다녀오면 으 레 가장 맛있는 것을 수진 씨에게 먼저 줬다. 좋은 곳이 있으면 수진 씨부터 데리고 갔다. 그만큼 아꼈다.
“우리 수진이가 나를 참 많이 닮았어요. 그래서 더 애틋했나 봐요. 딸과 오랜만에 여행을 오니까, 우리 수진이 어린 시절이 생각나네요. 내가 참 많이 데리고 다녔거든요. 감회가 새롭고 좋네요. 특히 우리 딸이 힘든 시기를 잘 견디고 새로운 마음으로 오니까 더 좋은 것 같 습니다.”
아버지의 이야기에 문득 지난날들이 죄송한지 수진 씨는 아버지의 옷 깃을 괜스레 여며준다. 슬그머니 손을 잡자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범바위가 어디라고?”하며 영랑호반 길을 시작해 범바위가 있는 곳까 지 걸었다. 그 뒤를 조용히 따르는 어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사실 부모님은 수진 씨가 카지노에 다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어려 서부터 꾸미기를 좋아하고 활력이 넘쳤던 딸이 점점 생기를 잃어 가 는 모습에 ‘무슨 일이 있나?’라고 짐작만 했을 뿐이다. 그 ‘무슨 일’이 ‘도박’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속 깊은 딸은 부모님에게만 은 자신의 힘든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혼자 도박중독을 이겨 내고자 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수진 씨는 자기 자신과 외롭게 사투 를 벌였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서서히 외적인 것부터 내적인 것까지 모두 변해가고 있었다. 부모님을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던 딸은 어 느새 연락조차 잘되지 않는 딸이 되었다.
기가 막혔어요. 도박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이상 하다고만 생각했어요. 애가 점점 몰골이 안 좋아졌으니까요. 그러다 가 나중에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정선 카지노에 다닌다고. 그 이야기 를 듣자마자 ‘거기를 왜 갔니’하면서 통곡을 했죠. 딸이 부모 생각이 극진해요. 그렇게 한바탕 난리가 나니까 본인도 깨달은 바가 있었나 봐요. 도박을 끊겠다고 해서 손뼉 쳐줬어요. 부모로서 믿는 수밖에 없 잖아요. 믿어주고 응원해 주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릴 때 속 한번 썩인 적이 없는 착한 딸이었기에 어머니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따스한 품으로 그녀를 품었다.
폭풍우 같던 삶에서 구원해준 가족의 믿음과 응원
정선 카지노를 간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친구가 스트레스 풀러 가자 는 이야기에 성큼 따라나선 것이 계기였다. 초반에 돈을 땄던 쾌감은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 점점 잃는 횟수가 많아졌지만, ‘한번 더’ 하면 잃은 돈을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빚은 늘어 아파트 2채에 버금가는 돈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하루에도 수십번 그만둬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일깨워 준 것은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처음에는 동생들이 제 상황을 알고 상담 센터를 추천해 줘서 다녔었는데, 잘 안됐어요. 그러다가 부모님께서 이 일을 알게 되셨죠. 부 모님께 정말 죄송하더라고요.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 길로 단도박 교육을 10회 받았습니다. 이제 단도박한 지 6년 정도 됐어요.”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녀의 삶은 폭풍우 같았 다. 그런 그녀를 평온한 바다로 이끌어 준 것이 바로 가족이다. 가족 의 품으로 돌아오니, 그동안 보지 못한 것들이 보였다. 나를 가장 예 뻐해 주셨던 아버지는 혈압약을 항상 드셔야 할 정도로 노쇠해졌고, 항상 내 편이던 어머니의 손과 얼굴에는 주름이 늘어나 있었다. 수진 씨는 지금이라도 부모님과 좋은 추억을 쌓고 싶었다. 영랑호 너머로 설악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연신 “정말 멋있다. 산새가 정말 멋있다”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3년 전에 큰 딸과 속초에 와 본 적이 있지만, 둘째 딸 수진 씨와 온 오늘 이 더 좋다고 해사하게 웃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복잡 미묘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은 남편뿐이다. 단도박한 지 3년째 되던 해에 만난 남편은 그녀가 단도박으로 힘들어할 때 곁에서 묵묵 히 지켜준 사람이다. 범바위 앞에서 핀 연꽃을 보며 “연꽃보다 더 예뻐요~”라며 그녀를 웃게 하는 것도, 대포항에서 맛있는 회를 그녀의 입에 제일 먼저 넣어 준 것도 모두 남편이다. 단도박을 하자, 암흑 같았던 수진 씨의 나날들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어릴 때 속 한번 썩인 적이 없는 착한 딸이었기에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따스한 품으로 그녀를 품었다”
후회로 가득한 지난 날, 따사로운 햇살만 가득할 오늘
신록이 돋아나고 푸릇푸릇 해진 영랑호 주변을 걷다 보니, 어느새 작 은 정자 영랑정에 이르렀다. 영랑정에 서서 내려다 본 호수 주변 풍경 은 영랑호를 마주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호수의 끝 지 점을 자세히 보니 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져 있다. 시원하게 펼쳐진 풍 광을 보니 어쩐지 마음도 개운해진다.
“저 때문에 마음 졸였을 부모님을 생각하면, 왜 진작 단도박을 하 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뿐입니다. 동생들에게도 미안하고요. 절 포기 하지 않고 응원해 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제는 부모님 마음을 편 안하게 해드려야죠.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아요.”
처음 친구와 함께 정선 카지노에 갔던 일부터 힘겹게 단도박을 했지만 술에 의지하며 살았던 최근까지. 왠지 고요한 영랑호를 보고 있노 라니,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폭풍우 같았던 지난날을 다시금 반복하지 않겠다고 새삼 다짐하는 수진 씨. 그리고 그녀의 곁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든든한 가족들. 이들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한줄기 비춘다. 그 햇살을 따라 수진 씨가 부모님의 손을 나란히 잡고 걷는다. 느린 걸음이지만 행복으로 향하는 길로 가족들은 차근차근 걸음을 옮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