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복사기의 다양한 얼굴
결국은 정성호로 통하죠

긴 말이 필요 없다. 표정과 제스처, 거기에 말 한마디면 웃음이 터진다. 가수, 개그맨, 배우 심지어 정치권 인사들의 모습까지 익살스럽게 재현해내는 건 개그맨 정성호의 필살기다. ‘인간복 사기’라는 별명을 지닐 만큼 대상의 특징을 날카롭게 잡아내 는 그이지만 사실 그는 완벽한 복제보다는 자신만의 색을 더 고민하는 편이다.
“어떤 캐릭터든 제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노래를 부 를 때 어깨가 머리 위까지 올라가는 조용필, 진지하게 노래를 하다가도 고음만 올라가면 목소리가 찢어지는 임재범, 힙합 을 하지만 부끄러움이 많은 버벌진트 등 제 방식대로 해석해 선보입니다.”
상대의 개성을 자신에게 맞게 정교하게 다듬어 불쾌함 없는 유머로 승화해내는 정성호. 웃음을 주지만 우스꽝스럽지 않 고, 똑 닮았지만 스스로의 존재감 또한 강렬하게 뿜어내는 게 그의 저력이다. 하지만 그가 대중의 뇌리에 박히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993년 MBC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를 했어요. 1,400여명 이 지원해 5명을 뽑는데 서경석 선배 성대모사로 제가 합격했 습니다. 얼마나 우쭐했겠어요. ‘제2의 이휘재’가 될 거라고 소 리치며 여의도를 뛰어다녔죠.”
자신만만하게 방송국에 입성했지만 실전은 녹록치 않았다. 개 그맨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았음에도 번번이 기회를 살리지 못 했고, 자연스럽게 역할은 작아져만 갔다. 더욱이 스스로를 돌 아보기 보다는 상황과 장소를 탓하기 시작했다. ‘코미디가 나 와 맞지 않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자 리포터부터 연기까지 다 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폭은 넓혔지만 늘 채워지지 않는 무언 가가 따라 다녔다.
“리포터를 하며 지방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어느 날 어르신 이 ‘자네는 누군가?’라고 묻더라고요. ‘개그맨 정성호입니다’ 라고 답하자 이어 ‘어떤 개그를 했는가?’라고 하시는데 떠오 르는 타이틀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아직도 그 어르신 얼굴이 기억나요.”
결국은 개그였다. 공채 합격 후 8년을 훌쩍 흘려보낸 그에게 진짜 가야 할 길을 알려준 한 마디에 다시 개그 현장으로 돌아 왔다.

길고 긴 무명,
내가 누구인지 찾아간 시간

“홍대 반지하방의 가스까지 끊기자 방송국에서 숙식을 했 어요. 친구도 끊고, 술도 끊고 오롯이 개그에만 집중한 시간이 었죠. 생각해보니 그전에는 이만큼 몰입해본 적이 없더라고요. 그 덕분에 배우 한석규 씨의 말투로 포인트를 잡은 <주연 아>라는 프로그램이 나오게 됐습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매달리자 길이 열렸다. 그토록 간절했 던 인기도 올랐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였다. 급작스러운 인기 에 휘둘려 간절함과 성실함을 쉽게 놓은 게 문제였다. 다시 친 구들과 어울리고 술을 즐기자 방송과는 또 멀어지고 금세 ‘뜨 려다 만 애’가 되어 있었다. 그 방황을 잡아준 건 결혼 과 첫째의 탄생이었다.
“가족을 위해 회식 외에는 술을 끊었어요. 그 랬더니 신기하게 다시 기회가 생기더라고요. 가수 임재범 씨의 분장과 성대모사를 한 방송이 화제가 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 받게 되었습니다. 카리스마 강한 가 수를 소재로 삼은 게 마음에 걸렸는데 임재범 씨가 직접 전화를 주셨어요. 힘들 때 <주연아>를 보고 큰 위로를 얻었다며 마음대로 따라 하라고요. 정말 감동이었죠.” 성대모사로 개그맨이 되었지만 그 무기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 한 나날들이 스쳐갔다. 개그 소재로는 너무 뻔하다고 생각해 일부러 멀리했지만 사람들의 열렬한 반응은 항상 그의 변신과 함께였다. 뒤늦게 자신이 가진 것을 제대로 들여다본 그는 인 디언 부족의 성인식 풍습 일화를 떠올렸다. 옥수수 밭을 관통 하며 가장 크고 잘 익은 옥수수를 단 한 개만을 따오되 지나온 길은 절대 돌아갈 수 없는 미션. 결과는 생각보다 볼품없는 옥 수수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앞에 가면 더 좋은 옥수수가 있을 거라 생각해 버리고 또 버 리다 막판이 되어서야 그리 좋지 않은 옥수수를 가지고 나오는 것이죠.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눈앞에 있는 내 것을 알아 보지 못하고 자꾸 욕심을 부려 다른 것만 만지작거렸 어요. 이제는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의 변신이 오히려 개그맨 정성 호의 가장 솔직하고 꾸밈없는 진심이었 던 셈. 돌고 돌아 찾은 진심은 자연스 럽게 웃음이라는 감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가장. 솔직하고. 꾸밈없는. 진심.
웃음이라는. 감동.

마음을 움직이는 힘
코미디는 늙지 않아요

정성호 표 개그는 생방송으로 관객들과 소통하며 진행되는 <SNL코리아>로 더 견고해졌다. 그간 다 풀지 못한 보따리를 하나 둘 씩 선보이며 웃음을 주고받은 무대는 언제나 감동으 로 돌아왔다. 요즘은 코로나 19로 무대에 설 일은 많이 줄었지 만 대신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즐기는 중이다. 수아, 수애, 수현, 재범까지 네 아이의 존재만으로도 일상은 감동으로 가 득하다.
“내가 왜 행복할까? 답은 간단해요. 때 묻지 않는 천사 네 명과 함께 살고 있거든요. 요즘은 아이들의 선생님 역할까지 하고 있지요. 아이들에게 재능이 부족해도, 돈이 없어도 된다 고 말해요. 착하게 살며 스스로 행복하기만을 바라죠. 현명한 아내 덕분에 아이들이 바르게 잘 자라주고 있어요.”
아이들을 향한 애정에 이어 아내 경맑음씨에 대한 애틋함도 빼 놓지 않는다. 다둥이 아빠로서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신기 하게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일이 잘 풀렸다. 아이들 하나하 나가 복덩이인 셈이다. 특히 막내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가수 임재범과 SNL코리아 크루로 만난 가수 박재범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재범’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정도다. 일이든 가정 이든 주어진 기회와 인연을 소중히 여겨 최선을 다할 때 서로 마음을 나눌 여유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은 그였다.
“이제 제가 가진 것을 잘 알게 되었잖아요. 평생 코미디를 하는 게 꿈이에요. 언젠가 수상소감으로 ‘사람이 오래 됐다고 아이디어까지 오래된 건 아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나이를 먹으면 코미디를 못한다는 편견을 깨고 싶어요. 요즘은 매체 가 달라지면서 코미디의 흐름도 변해가고 있어요. 각본이 있 는 긴 호흡의 콩트가 아닌 굉장히 짧은 시간에 소비하는 코미 디가 떠오를 거라 생각합니다. 이에 대비해야죠.”
‘웃음’은 ‘준다’라는 동사와 호응한다. 기꺼이 남을 위해 웃음 을 주는 이들이 있기에 누군가는 한바탕 웃음으로 시름을 털 고 위로를 얻는다. 개그맨 정성호는 앞으로 어떤 웃음, 어떤 감 동으로 찾아올까. 그 어떤 얼굴로 등장하더라도 이제는 그 안 에 담긴 치열함, 고민, 진심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을 움직이는 정성호 본연의 얼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