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을 되찾은 일상

남쪽에서부터 올라온 봄기운이 닿았는지, 삼척의 골골샅샅 꽃봉오리들이 활짝 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금 이른 봄을 맞으러 삼척을 찾은 고부 얼굴 위로 3월의 햇살과 설렘이 넘실댄다. 차에서 내려 마른 가지 끝에 돋은 새순과 꽃봉오리를 구경하던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님, 고기도 좀 드세요. 채소가 더 좋으신가요? 맵진 않아요?” 본격적인 여행 시작 전, 식사하는 내내 그녀의 젓가락이 분주하게 시어머니 앞을 오갔다. “맛있다, 괜찮으니 너도 얼른 먹어라.” 하면서도 며느리의 살가운 행동이 좋은 듯 시어머니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현재 암을 앓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정정했다. 옆에 앉아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부위만 골라 닭고기를 바르고, 화장실에 간 시어머니가 언제 오시나 고개를 빼고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시어머니가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애교 많고 쾌활한 며느리지만, 9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지독한 도박중독에 시달렸다. 친구의 소개로 도박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선을 넘고 깊은 수렁에 빠진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남편과 이혼하고 두 아들까지 군대에 가고 나니 헛헛해진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운영하던 가게와 갖고 있던 아파트를 잃었지만, 이미 비어 있는 마음을 차지한 도박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낮에는 장사하다가 저녁에는 기차를 타고 카지노로 가 새벽까지 게임을 즐겼던 하루가, 언제부턴가는 카지노에서 시작해 카지노에서 끝났다. 그러다 우울증이 와서 스스로 삶을 끝내려는 시도도 했다. 친구도 만나기 싫고, 밖에 나가기도 싫을 정도로 인생의 벼랑 끝에 몰렸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도박에서 빠져나오는 게 그렇게도 어려웠다.
그런 그녀가 평범한 삶을 되찾은 건 KLACC의 ‘단비모임(단도박으로부터 비상하는 모임)’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더 이상 자신을 방치했다가는 황량하고 추운 인생의 겨울이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녀에게 단비모임은 말 그대로 새 시작을 알리는 ‘단비’였다.

‘소망의 탑’에서 맑고 청아한 종소리를 들으며 희망찬 내일을 약속하는 고부

묵묵히 기다려줬던 그 사람

“삼척은 어머님 고향이에요. 지금은 많이 변해 여기가 어딘지, 저기가 어딘지 알아보기 힘들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고향에 오신 김에 친구도 만나겠다고 하시네요. 삼척으로 오길 잘한 것 같아요.”
이사부 사자공원으로 가는 길, 촛대바위를 보고 시어머니가 반가워한다. 모든 것이 변해도 그것만은 그 자리에 있으니, 옛 생각이 나신 모양이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시어머니 손을 꼭 잡은 그녀가 바닷바람에 감기라도 걸리실까 한 손으로 시어머니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었다.
언뜻 보면 인생의 반을 함께 살아온 것만 같지만, 두 사람이 고부의 연을 맺은 지는 채 4년이 되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 살아도 ‘시’ 자가 앞에 들어가는 가족은 어렵다는데, 서로를 바라보는 내내 미소가 가득한 그녀와 시어머니는 모녀 사이 같았다.
멀리 사는 자식들 대신 며느리가 투병 중인 시어머니를 모시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그러나 그녀는 기꺼운 마음으로 시어머니와 함께하는 삶을 택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남편이 남겨준 소중한 인연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녀가 도박에 빠져있을 때 친한 동생이 소개해준 사람이었다. 도박에는 관심이 없던 남편은 그녀를 외면하기보다 양지바른 삶으로 이끌고자 노력했다. 다그치고 억지로 끊어내는 대신, 기다려주고 함께해주었다. 그녀가 스스로 KLACC의 단비모임으로 향한 이유도 남편의 지극정성이 마음을 울렸기 때문. 중독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단비모임이었다면, 남편은 그 단비모임으로 이끌어준 마중물이었다. 단비모임 참가자들과 함께 상담도 받고, 그림도 그리고, 여행을 다니는 동안 남편은 도박에 중독된 상태가 아니면서도 그녀와 동행하며 용기를 주었다. 그렇게 찬 겨울이 지나고 그녀 인생에 봄이 찾아왔다.
“남편은 제 인생의 은인이에요.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저는 평생 도박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을 거예요. 카지노 앞에서 기다리고, 단비모임에 데려다주고, 어떤 때는 함께하고. 그 오랜 시간 남편은 한마디 불평도, 불만도 없었어요. 그냥 저를 기다려주었죠. 그게 너무 힘이 되었어요. 그래서 남편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고맙기만 해요.”
더는 단비모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도박에서 자유로워지자 두 사람은 2015년 5월,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년 뒤 남편은 폐암 선고를 받았다. 이미 암 투병 중인 시어머니에 이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남편은 2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고, 한 사람의 어머니와 한 사람의 아내는 그렇게 가족으로 남게 되었다.

함께 맞이하는 봄

밖에 나가길 꺼리던 시어머니의 손을 잡고 삼척으로 온 것도, 두 사람이 소중한 사람을 동시에 잃었기 때문. 시어머니는 지난해 9월 아들을 먼저 보낸 뒤 첫 외출이다. 자식을 먼저 보낸 노모의 가슴이 어떤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런 시어머니의 마음에 혹시라도 짐을 더 얹게 될까 봐, 그녀는 지금까지도 도박에 빠져 있었던 과거를 차마 말하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인생을 구해준 남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남편이 그렇게 떠나고 마음이 허전하니까, 또다시 도박의 유혹에 시달리게 되었어요. 결혼한 뒤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우울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최근 다시 상담도 받기 시작하고, 단비모임도 나가게 됐어요. 내가 또 도박에 빠지면, 그건 남편과 어머니를 배신하는 거잖아요.”
며느리에게 고마운 건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다. 병원이나 요양원을 싫어한다는 시어머니는 지금도 가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네가 있어서 내가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봄이 오기 전 기승을 부리는 꽃샘추위처럼 남편과 사별은 그녀를 다시 한번 흔들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이겨냈기에 도박이 아닌, 단비모임 활동과 시어머니와 보내는 평범한 일상으로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요즘은 이 위기도 지나면 많은 단도박자가 그런 것처럼 저도 KLACC에서 중독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다른 소망이 있다면 우리 시어머니, 아니 어머니와 오래도록 함께 잘 살고 싶어요. 평범한 사람들처럼요.”
어떤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전해진다. 여행 내내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던 시어머니도 아마 같은 마음 아닐까. 그녀와 시어머니는 ‘소망의 탑’ 아래에서 건강하고 따뜻한 앞날을 바랐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벌써 봄이 성큼 다가온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