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그리고 대화
여행은 수많은 목적을 가진다. 누군가는 잊기 위해, 누군가는 찾기 위해, 누군가는 다지기 위해, 누군가는 즐기기 위해…. 여행은 숱한 동기로부터 출발하지만 한 가지 변함없는 것은 지금 있는 이 자리의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을 목적지로 삼는 ‘일탈’을 기본 정체성으로 갖는다는 것이다. 이번 캠프 역시 그러했다. 강원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3박 4일 일정으로 동기강화 통합캠프에 참석한 인원은 총 31명.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여행이었다.
거제도에서 시작한 캠프 둘째 날의 일정은 오전 8시 30분 해결중심 집단상담으로 시작됐다. 3박 4일 간의 여정을 함께 할 사람들이 자기소개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현장이다.
“이번 여행은 ‘통합캠프’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간 단계별로 심화되는 캠프를 진행해왔다면 이번 여행은 2단계 ‘명상인문학 여행’과 3단계 ‘동기강화 캠프’가 합쳐진 형태로 열린 거지요. 쾌적하고 여유로운 환경에서 철학강의도 듣고 역사 속 인물, 근·현대사를 직접 체감하는 일정으로 진행이 됩니다.”
이번 캠프를 이끌고 있는 김용근 전문위원의 설명이다. 자기소개 시간, 의외로 많은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아직 카지노에 출입하는 사람들, 단도박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 단도박 결심의 언저리에서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등 이번 여행의 멤버들이 꽤나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덕분이다.
뜻밖의 상황은 단도박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누구도 권유하지 않았음에도 단도박 이후 자신의 삶이 얼마나 긍정적으로 달라졌는지, 소소하게 누리는 행복 등에 대한 경험담을 아낌없이 공유했다는 사실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뭐라도 하나 배워갈 것을 당부한 주최측 입장에서는 더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 인생은 얼마나 좋은 카드를
손에 쥐었는지 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카드를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에 달려있다.
-조쉬 빌링스(Josh Billings)- ”
감정과 욕망을 들여다보다
두 번째는 순서는 서강대 생명문화연구소 상종열 교수의 철학치유 특강이었다. 자신도 어머니의 도박중독으로 삶의 굴곡을 겪었다고 운을 뗀 상종열 교수는 3시간 여에 걸쳐 강의를 진행하는 동안 스스로의 욕망과 감정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제시해 참여자들에게 깊은 공감과 울림을 이끌어 냈다.
“단도박의 세계에 오려면 계기가 필요합니다. 서로 감정적 교류를 하고 그걸 통해서 도박을 끊고 회복의 과정으로 넘어오는 계기를 마련하는 게 중요하죠. 이번 강의는 거기에 포커스를 맞춘 강의였습니다. 양면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들여다보면서 ‘왜 도박을 하는가, 욕망의 구조가 뭔가’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테이블에 앉아있는 나의 감정, 여기에 오기까지 뭔가를 기대하는 감정, 카지노에서 돈을 잃고 내게 혐오를 느끼면서도 여길 끊지 못하는 감정 등의 요인이 뭔지 살펴보자고 했지요.”
상종열 교수는 강연 말미까지 ‘내 감정이 무엇인가, 벗어나지 못하는 욕망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고 잠들기 전에 생각해보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했다.
강연 후 뜨끈한 해물된장찌개로 점심식사를 마친 뒤 오후에는 거제도 관광에 나서보기로 했다. 조선소를 방문하기 전까지 카페에 모두 모여 느긋하게 커피와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는 시간 역시 참가자 모두에게는 참으로 소중했다.
“카지노에만 박혀 있다가 이렇게 멀리 나오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누군가의 말에 주변 사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한다.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 마시고 작은 커피빵을 나눠먹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흐뭇하고 여유로운 미소가 감돈다.
이 땅의 역사와 현실을 느끼게 한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철학치유 특강이 참 좋았습니다.
특히 ‘자기가 설정한 것에
가치를 두고 인생을 살아가라.
남과 비교하거나 남을 탓하지 말고
자존감을 갖고 가라’라는 부분이
마음에 크게 위안이 됐습니다.”
긴 여정의 첫 발자국
약속한 시간이 되자 모두가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로 출발을 했다. 거북선을 만든 충무공의 후예답게 세계 최고 수준의 선박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긍지를 만나볼 시간이다. 옥포조선소에서 건조하는 배의 종류, 규모, 철판 8천 조각을 이어 붙여 배를 만드는 방법 등에 대해 설명하던 조선소 직원은 참가자들 중 상당수가 배 건조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음에 살짝 놀라기도 했다.
조선소의 상징인 골리앗크레인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잠시 정차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조선소의 구조, 배의 건조부터 물에 띄우는 방법까지 차근차근 설명을 들었다. 특히 “그간 조선사업 악화로 국민 여러분들께 걱정을 많이 끼쳤다. 이제 다시 회복해서 달리고 있으니 안심하시라”는 직원의 인사에는 큰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두 번째 방문지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이다. 6.25전쟁의 아픔과 참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이곳에는 탱크전시관을 비롯, 수용자들의 생활상, 폭동현장 등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픈 전쟁의 역사를 거쳐 지금의 발전을 이룩한 우리나라의 저력을 새삼 느끼는 한편,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관람을 마쳤다.
“오늘 하루 참으로 알찬 시간을 보냈습니다. 개인적으로 철학치유 특강이 참 좋았어요. 단도박을 결심한 지 5년이 됐는데 사실 그건 바닥을 쳤다는 얘기거든요. 강의 내용 중에 ‘자기가 설정한 것에 가치를 두고 인생을 살아가라. 남과 비교하거나 남을 탓하지 말고 자존감을 갖고 가라’라는 부분이 마음에 크게 위안이 됐습니다.”
오늘 하루 내내 손을 꼭 잡고 다닌 부부 참가자가 오늘 하루의 소회를 묻자 길고 긴 답변을 들려준다.
중독, 그것은 무엇이든 벗어나기 힘든 존재다. 하물며 도박에서 위로와 충족감을 찾아온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오늘 여기 이 자리 온 사람들은 함께 격려하고 위로하며 그 힘들다는 길을 걸어보겠다고 용기를 낸 사람들이다. 도박중독의 수렁에 빠진 사람들, 수렁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이번 통합캠프는 험난한, 그러나 위대한 여정의 첫 발자국이 아니었을까? 지금 발 딛고 선 이 땅의 역사와 현실을 자각하는 것 또한 중독에서 벗어나 회복으로 향하는 또 다른 가능성일 터. 내일 일정으로 위해 숙소로 돌아가는 이들의 얼굴에서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보냈다는 안도감과 여유가 스쳐간다.
철학치유 특강을 듣는 참가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