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 빠진 사람들마저 살려내는 치유제,
공감
“많은 사람들이 공감이라고 하면 따스하고, 포근하게 대해주는 것 정도로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과녁을 찾아 정확하게 그곳을 맞출 때 지옥에 빠진 사람들마저 살려내는 치유제가 바로 공감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맥락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거리는 것은 공감이 아니라 감정노동에 가깝다.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사연을 듣다가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경험 역시 감정적 리액션에 불과하다. 정혜신 박사는 존재의 감정적 핵심이 드러났을 때 아무런 토 달지 않고 온전히 수용하는 것이 공감하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에 친구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분이 있었어요. 그분 역시 모진 고문 끝에 10여 년간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죠. 처음 만났을 때 그분은 사소한 일에도 칼부림을 할 정도로 분노덩어리 같았어요. 그를 고문했던 수사관의 뒤를 평생 밟으며 그 수사관을 죽일 수 있는 기회만 찾으며 살았다고 해요. 30여 년 동안 ‘오늘 실패하면 내일은 꼭 죽여야지’라고 다짐하며 살았던 분입니다. 30여 년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분노를 끌어안고 살다가 일생에 처음으로 마음을 터트린 겁니다. ‘날마다 살의를 느끼며 살인을 다짐하는 나는 쓰레기 같은 괴물’이라며 괴로워하셨어요. 그분에게 제가 뭐라고 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살면 진짜 쓰레기 같은 괴물이 되니 이제 잊어라? 이제 용서하라? 아니었다. 왜 당신이 괴물이냐, 당신을 그토록 모질게 고문하고도 멀쩡하게 잘살고 있는 그 고문관이 진짜 괴물이다. 다음 번에 만나면 마음먹은 일 꼭 성공하라는 말에 그는 목 놓아 펑펑 울고 또 울었다. 이후 그는 고문 수사관의 뒤를 밟는 일을 그만두었다.
“감정의 핵심이 드러났을 때 아무런 토도 달지 않고 온전히 수용해 주었습니다. 망가질 대로 망가져 진창에 빠진 삶이라고 자책하는 그에게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식의 훈수 두는 말은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가벼운 위로의 말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진지한 경청
공감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감의 지점까지 가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적당한 선에서 고개를 끄덕일 준비부터 해서는 안 된다. 정혜신 박사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묻고 물으며 상대방의 심연까지 들어가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2 학생이 있어요. 학교에서 심리검사 결과 우울증이 심하고 자살충동지수가 높게 나왔다고 해요. 왕따의 고통, 부모님의 무관심 등에 대해 상황만 들어서는 이 아이의 마음과 만날 수 없습니다. 이야기의 끝에는 그런 상황에서 ‘네 마음은 어땠니’라고 물어야 해요. 만약 아이의 입에서 ‘나만 사라지면 다 깨끗해질 것 같았다’라는 말이 나왔다면 정확한 공감의 지점까지 들어간 것입니다. 아이가 느끼는 감정의 지점이 나와야 존재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때 ‘그랬구나, 네가 그런 마음이었구나, 요새 기운이 없었던 게 그 때문이었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어요. 다른 말 필요 없이 ‘그랬구나, 내가 몰랐구나’ 하는 식으로 다독여 주면 그 말이 치유의 전부가 됩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드러난 존재의 핵심을 온전히 수용하는 어마어마한 말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죠. 다시 말하지만 정확한 과녁을 찾아 존재의 핵심까지 들어가 그 모두를 수용하는 것이 공감입니다.”
혹자들은 전문적인 지식도 없이 가능하냐고 반문한다. 누군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온 말을 듣고도 아무런 위로의 말도 못해주면 상황이 난감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정혜신 박사는 ‘온전히 집중하여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전문가의 소양’이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해 보렴’, ‘관계를 해결해 보는 것이 어떻겠니’라는 식으로 조언을 하는 것 자체가 비전문가적 행위라는 것이다.
심리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산소,
“그랬구나”
정혜신 박사는 이것을 ‘간단한 기술로 인간의 삶을 바꾸는 적정 기술’에 빗대어 ‘적정 심리학’이라는 말을 쓴다. 적정 기술처럼 적정 심리학이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현대의 고도화된 정신의학은 마음의 문제를 뇌과학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내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 공감받기 위해 병원을 찾아도 정작 병원에서는 증상 몇 가지를 바탕으로 약물 처방만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현대의학은 내 삶, 내 마음 즉 어떤 본질적인 나의 일상에 대해 묻지 않는다.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효과 좋은 알약이 아니라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는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라고 강조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너무 행복해 보이고 다들 부러워할 만한 상황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힘든 분들이 계시죠. 그런 분들이 고통을 토로했을 때 ‘네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니, 남들은 너를 얼마나 부러워하는데. 네가 가진 것이 얼마나 훌륭한데’라는 식으로 위로하는 경우가 있죠. 표면적인 이야기만 하는 거에요. 산소가 부족해서 시들어가는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것과 비슷한 겁니다. 누군가 축 처진 어깨로 다가와 죽고 싶다고 했을 때 따뜻하게 안아주며 ‘네가 그런 마음이 드는 데는 이유가 있겠구나’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공감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정혜신 박사는 심리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산소가 바로 ‘당신이 옳다’는 확신이라고 말한다. 이 공급이 이어지지 않으면 심리적 생명도 서서히 꺼진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대목이 있다. 그릇된 행동이나 생각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도 ‘옳다’라고 이야기해줄 수는 없지 않을까. 하지만 정혜신 박사의 대답은 여전히 ‘옳다’라는 마음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자신도 상대방도 위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네가 옳다는 건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걸 알아주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옳다’는 말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다. 나처럼 바보 같은 사람에게, 나처럼 형편없는 사람에게, 나처럼 바닥을 헤매는 사람에게조차도.
하지만 공감강박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한다. 정혜신 박사는 나를 찌르는 사람에게 ‘나를 찌르느라 팔이 얼마나 아플까’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며 나에게 소중한 사람을 위해 공감하라고 조언한다. 공감이 관계의 만병통치약은 아니니 자신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옳다’라는 건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것이다.
‘당신이 옳다’는 말이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이유다. 나처럼 바보 같은
사람에게, 나처럼 형편없는 사람에게,
나처럼 바닥을 헤매는 사람에게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