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남편을 위해, 아내가
백두대간 마루를 넘는 문경새재는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한양 과거길을 오르내리던 선비들의 청운의 꿈과 백성들의 삶이 서려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을 찾은부부는 평소에도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을 즐긴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지역에서의 하룻밤은 지친 일상을 재충전할 수 있는 활력소가 된다. 우리나라 곳곳의 명소를 다 둘러봤지만, 이곳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 군사적 요새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제1관문을 지나 산책로에 접어든 부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여보, 이 열매가 무엇인지 알아요? 한 번 맛봐요. 예전에는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귀한 약재로 대접받잖아요.”
뽕나무의 오디를 하나 따 남편은 아내의 입속으로 넣어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소소한 행복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믿음직스러운 남편이었지만, 한동안 말없이 가슴앓이를 하는 모습은 옆에서 지켜보기 안타까웠다.
2001년 1월 남편의 후배가 재미삼아 데리고 온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15년의 시간을 흘려보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매일 서울에서 내려와 카지노에서 꼬박 밤을 새우고는 다시 올라가는 생활의 반복…. 1982년 식자재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탄탄대로를 걷던 남편이었지만, 도박 중독 이후로 점차 회사일은 소홀하게 되었다. 그런 남편을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 역시 어느새 함께 게임에 빠져들었다. 밤새 게임을 하고, 새벽이면 서울로 올라오던 남편은 졸음운전으로 몇 번 큰 사고가 나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에는 남편이 걱정되어 카지노에 동행했던 아내였지만, 부부가 함께 도박이 일상이 되는 악순환에 휩쓸리고 말았다.
아버지로서의 자존심
“게임은 좋아하지도 않는 성격인데, 나를 따라 왔다 갔다 하면서 아내까지 도박중독이 되고 말았죠. 정말로 아내한테 미안합니다.”
카지노에 드나들면서 하루에 피는 담배가 무려 4갑이 넘었다. 목이 아프고 가슴통증도 느꼈지만, 2004년 서울에서 사북으로 이사 올 정도로 게임으로부터의 유혹은 더 커져만 갔다. 동종 업계에서 인정받던 사업도 정리하고, 차곡차곡 모아둔 재산까지 한순간에 날려버린 채 사채까지 쓰게 되었지만 여전히 도박중독의 심각성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했었다. 아마도 그 때의 일이 아니었다면, 부부는 아직도 카지노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 당시 아들이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날도 게임을 했죠. 순식간에 다 잃었어요. 몇 번만 더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사채까지 썼지만…. 아들에게 돈 좀 보내달라는 전화를 했습니다. 얼마 후에 ‘보냈어요’라는 문자와 함께 5백만 원이 입금되었는데, 아들이 건넨 ‘아버지! 그러고 싶으세요!?’라는 한마디가 정신을 번쩍 깨우며 가슴을 가르는 것 같았어요.”
아들의 말에 곧바로 옆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아내를 데리고 객장을 나왔다. 구정은 다가오는데, 차례를 지낼 비용까지 도박에 올인 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곧바로 KLACC을 찾아가 출입 영구정지를 신청했다. 그렇게 2016년 2월 3일 단도박을 결심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카지노에 가고 싶다는 조급함이 들지 않았다.
사극 대하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만든 오픈 세트장
오직 사랑하는 아내에게, 남편으로서
도박을 하지 않으니, 제대로 된 일상이 시작되었다. 도박중독으로부터의 회복은 곧 일상의 회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질문을 매일 스스로에게 던진다. 아내가 먼저 솔선수범하여 변화되는 모습을 조금씩 남편에게 보여줬다. KLACC의 치유 프로그램인 여행모임을 시작으로, 직업재활을 통해 제빵과 캔들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제빵 학원에 아내를 세트장를 차로 태워다주던 남편도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 빵 굽는 솜씨를 뽐냈다. 동료상담사 과정을 이수한 후, 주위 사람들에게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아내 곁에서 남편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도박중독과 회복을 직접 경험한 선배로서 회복의 주체는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실제로 남편의 진심어린 대화가 카지노에 빠진 후배 부부를 도박중독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다.
“일단 마음을 굳게 먹고 정지를 하면, 어떻게든 살아갈 길이 열려요. 지금은 큰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다만 건강하게,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생활하고 싶습니다. 좋은 곳으로 여행도 자주 다니면서 항상 마음을 새롭게 할 거에요.”
지난 4월에는 남해와 여수, 한려수도 등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가끔씩 마음이 나태해질 때면 부부는 자동차에 몸을 싣는다. 운전하는 남편을 위해 커피 한 잔을 따로 챙기는 것은 아내의 세심한 배려이기도 하다. 도박에 빠진 남편이 회사까지 문 닫고, 넉넉했던 살림살이가 어렵게 되었을 때에도 아내는 묵묵히 남편의 곁을 지켰다. 언젠가는 남편이 다시 예전의 책임감 있고, 멋진 가장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힘들었던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 아내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남편 역시 더 이상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1년 넘게 인력시장에서 땀 흘려 일하기도 했고, 지금은 매일 새벽마다 숙박시설의 순환봉고를 운행하고 있다.
한참을 걷다보니,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에 도착했다. ‘태조왕건’을 비롯하여 ‘불멸의 이순신’, ‘대조영’ 등이 촬영된 곳으로, 경복궁을 재현한 대웅전에는 왕과 왕비의 의상을 착용할 수 있는 무대가 있었다. 대례복으로 갈아입은 부부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했다. 남편이 아내에게 속삭인다. “당신과 함께하여 행복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내가 남편을 향해 미소를 짓는다. 부부라면, 그들처럼. 문경새재의 녹음이 부부와 함께해 더욱 푸르러 보인다.
(좌)오픈 세트장 용상체험 / (우)문경새재도립공원 탐방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