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갑자기 웃기 시작했냐면요…

화가가 갑자기 화풍을 바꾸는 데는 계기가 있게 마련이다. 회화를 전공한 이순구 화백은 1987년 졸업한 이후에도 한동안은 실험적인 회화작품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돌연 그의 작품들이 온통 웃는 얼굴로 바뀌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지기로는, 대여섯 살 무렵 아들이 그려준 ‘아빠의 얼굴’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서툰 아들의 그림 속 아빠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정작 아빠는 웃을 일이 별로 없었는데도 아들은 용케도 아빠의 웃는 얼굴을 포착한 것이다.

“단골 질문이죠. 그런데 사실은 한번도 속내를 말한 적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당시 저에게는 미술계를 비웃고 싶은 불온한 의도가 있었어요. 80년대 후반, 90년대까지만 해도 미술계가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이론을 중시하고 작품 속에 철학적 의미를 담으려고 하다보니 그림 자체가 어려웠어요. 어느 순간 남의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만의 작품세계를 찾고 싶어 한동안 작품활동을 중단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초기의 웃는 얼굴은 다소 시니컬하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아니다’라는 듯한 표정이다. 그런데 웃는 얼굴을 그리면 그릴수록 웃음에서 냉소적 요소가 빠지기 시작했다. 이순구 작가는 그림 뒤에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순수하게 웃는 얼굴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웃음에서 냉소적 요소가 빠지면서 얼굴은 더 둥글둥글 복스러워지고 밝아졌다. 그는 요즘도 작품 속에 복잡한 메시지를 넣는 대신 밝고 환한 웃음을 극대화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한다. 작품을보며 힘을 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의 웃는 얼굴을 관찰하면서 진심으로 즐거울때 웃는 웃음에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잇몸이 한껏 드러나는 치아, 목젖이 보일 만큼 벌린 입, 너무 웃으면 눈뜨기도 힘들어진다. 이순구 작가의 웃는 얼굴에는 공통적으로 코가 없다

“웃는 얼굴을 오래 관찰한 결과 웃을 때 가장 변화가 적은 부분이 코더라고요. 웃는 얼굴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코는 생략하게 되더군요.”

웃음이 힘이다

“내가 웃는 얼굴을 많이 그리니까 나에게 웃음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그걸 생각하며 그리지는 않아요. 그래도 자꾸 물으니 답이 필요하겠다 싶어 쓰기 시작한 말이 ‘웃음이 힘이다’라는 말입니다. 사인회할 때 많이 사용합니다.”
작가는 순수하게 웃는 얼굴이면 충분하다고 여기고 싶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입맛대로 해석하려 한다. 특히 치유나 힐링 등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그의 작품을 ‘효험’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세태가 더해져 씁쓸하다. 이순구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치유의 힘을 말하는 것은 너무 섣부른 생각이라고 경계했다. 작품을 활용해서 웃음치료 프로젝트를 해보자는 제안이 쏟아지고 있지만 완고하게 고사하는 이유다. 단순히 자신의 작품이 상업미술로 변질되는 것을 염려한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아끼는 작품들이 시류를 타는 작품으로 변질될까봐 두렵다.
“저를 두고 ‘웃음전도사’라고 말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요. 나는 그저 그림을 그리는 작가일 뿐입니다. 그래서 웃음치료니 하는 사회적현상에 휩쓸리고 싶지 않아요. 우르르 몰려와 유행처럼 소비하다가 웃음치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시들해지면 함께 잊혀지는 도구가 될까봐 걱정입니다. 작품은 그저 작품으로 봐주기를 바라는 것이 작가로서의 욕심입니다.”
초창기, 공공기관 등에서 그의 작품들을 좋은 의도로 쓰고 싶다고 연락이 오면 선뜻 제공했다. 그러나 담당자가 바뀌는 등의 이유로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상업성은 철저히 배제하겠다는 것이 작가로서의 고집이다. 치과 등에서 광고요청이 들어오고 있지만 한 번도 응한 적이 없다.

분노와 슬픔을 무력화시키고 스스로 행복해지다

미술계에서는 그를 ‘이상한 놈’이라고 폄하했다. 왜 잘 그리던 순수회화를 포기하고 ‘싼티 나는’ 그림을 그리느냐는 것이다. 그에게 확신을 준 것은 미술계의 평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며 행복해한다는 말에 처음엔 좀 긴가민가했어요. 정작 저는 제 작품을 보며 웃지 못했거든요. 모든 작가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작품을 그리는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라 완성된 작품에 마음 놓고 웃지 못합니다. 하지만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작품 속 인물들만 웃는 모습인 게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웃음을 주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래서 요즘은 다양한 방식으로 웃음을 주는 요소들을 시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얼굴은 스마일마크를 연상시킬 만큼 단순화시켰지만 인물의 손바닥을 그릴 때는 손금까지 그려넣는다. 일부러 장수하는 손금이나 부자가 되는 손금을 그려 넣는 식으로 웃음을 준다. 잉어를 안고 있는 아이처럼 민화적 요소를 가미할때도 있다. 민화에서 잉어는 ‘출세하라’는 의미임을 알고 나면 절로 웃음이 터진다.
“예전에 한 미술평론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작가들에게 선물로받은 작품들을 창고에 넣어두다가 그 작가가 방문한다고 하면 부랴부랴 창고에서 꺼내 걸어둔다고…. 평소에도 자주 보고 싶은 작품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 글을 읽으면서 작품의 쓰임새가 무엇인가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편안하게 걸어놓고 오랫동안 볼 수 있는 작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거창하고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단다. 초창기, 서울의 혜화동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그는 ‘어떤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러와 줄까’ 걱정이 많았었다. 그런데 전시회를 열 때마다 놀라는 점은 저 멀리 강원도에서도 그림을 보러오고, 병실 머리맡에 놓고 매일 보며 위안을 받았다는 분들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작품의 힘이겠는가 반문한다. 오롯이 웃음이 주는 힘이라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