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
“산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는 이렇게 말했다. 목마름에 대한 해결은 목마름에 대한 의미를 생각할 때가 아니라 물을 가지러 일어설 때부터 해결된다. 어차피 시간은 지나가고, 우리에게 의미 따위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는 경험하고 늙어갈 뿐이다.
오늘 아침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으며, 그간 만났던 몇몇 거대한 풍경을 떠올렸다. 자연이 펼쳐 보이는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 나는 매번 숨 막히는 경이를 경험했다. 내몽골 지역 초원의 게르에서 하룻밤을 보냈을 때도 그랬다. 몽골인들과 마신 백주에 취한 나는 밖으로 나와 풀밭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때 바라본 하늘. 눈앞에 떠 있던 별. 쌀알을 뿌려놓은 듯, 유리알을 박아놓은 듯, 셀 수 없이 환하던 별. 손으로 훑으면 후드득하고 떨어질 것만 같던 별, 별, 별들…. 도대체 저런 풍경 따위가 뭐냐고 묻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10분만 봐도 지루해지는 게 풍경 아니냐고 말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일단 경험해보라고 말해주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살아오면서 경험한 엄청나고 압도적인 공간감이, 비록 내 삶을 뒤바꿀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음의 어느 부분을 얼마간 넓혀준 것은 사실이다. 근처의 한정된 공간들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내게 여행에서 만난 ‘비현실적인 현실’은 숨 쉴 틈을 마련해주었고 약간의 허무를 느끼게 해주었다. 실수나 자질구레한 사건, 다툼 따위를 ‘에이, 이런 것쯤이 뭐라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피라미드 앞에서 배운 ‘허무의 감각’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죽어서 저렇게 커다란 삼각형도 하나 못 만드는 인생, 대충 넘겨가며 사랑하며 살자’ 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니까.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숨이 막힐 만큼 거대한 규모 앞에 서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 경험은 분명, 좁디좁은 생활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 안 깊숙한 곳에 몇 평 무(無)의 공간을 마련해줄 테니까.
무엇이 더 ‘리얼’한 삶일까
요즘은 조금 더 ‘리얼’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내 손을 잡고 마트에도 가고 아이들과 텃밭도 가꾸고 서툴지만 요리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어이, 오늘도 수고했어’하며 서 있다. 나는 손을 탁 탁 털고는 베란다 앞으로 가서는 붉은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감각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렇게 마음먹게 된 계기는 지난해 갔던 갈라파고스 여행 때문이다. 갈라파고스를 여행하고 있을 때, 에콰도르에서는 강도 7.8의 지진이 발생했다. 바다에는 쓰나미 경보령이 내렸고 우리가 탄 배는 지진의 진원지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밤새 밤의 수평선을 향해 달려야 했다. 어느 순간, 선실 레스토랑에 모여있던 여행객 중 누구 한 명이 울기 시작했는데, 배는 곧 울음소리로 가득 차버렸다. 나는 선실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아 지나온 내 생을 떠올렸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말고는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선실에 앉아 나는 내가 더 큰 아파트에서 살지 못한 것을, 더 비싼 자동차를 가지지 못한 것을, 더 좋은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을 후회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새벽 일찍 떠나오느라 일곱 살 난 딸아이를 안아주지 못한 것이, 아내의 볼에 키스하지 못한 것이 오직 후회될 뿐이었다. 만약 그 순간 신이 나타나 마지막 부탁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내 가족을 안아보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쓰나미는 오지 않았고 아침 수평선 너머로 찬란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었다.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해져 갔다. 그 여행 이후, 나는 틈날 때마다 아이를 안아주고 아내의 손을 더 자주 잡는다. 더 자주 사랑한다고 말한다. 포옹과 사랑을 빼고 나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다시 코엘료를 이야기하자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건 피로하다는 느낌. 나이를 먹었다는 느낌뿐이지”라고. 맞다. 그리고 이는 또한 우리가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있어도, 땡볕이 내리쬐는 사막을 걷고 있어도 우리는 어차피 늙어가고 있으니까. 어느 선배 여행자가 말했듯, 소중한 것을 깨닫는 장소는 컴퓨터 앞이 아니라 파란 하늘 아래서다.
- ❖ 최 갑 수 여행작가
- 시인, 여행작가, 생의 탁색가, 길의 몽상가. 여행을 다니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세상을 독서하고 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삶의 가치와 아름다운 이치를 배운다.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위로였으면 좋겠다>,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 등 많은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