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떠나요

한 그루 은행나무의 천년 세월 앞에서
인간을 돌아보며 지금의 행복에 젖어보네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글. 신나라
사진.홍영기

천년을 산 나무 앞에서 백 년이나 되면 길다 하는 인간의 인생이란 얼마나 짧은가. “소유와 집착이 그 삶에 얼마나 중요한가?” 무성한 가지와 아름찬 밑동으로 무애한 시간을 증명하던 반계리 은행나무는 도박중독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그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아직 한 번도 안 가보셨다면 반계리의 은행나무를 보러 가시면 어떨까요?” 추천까지 받고 먼 길을 달려왔는데, 다섯 사람이 고고한 은행나무 앞에 섰을 때는 당혹스러운 마음이 먼저 솟았다. 으레 있을 법한 유명 관광지라면 으레 있을 법한 기념품 가게도, 식당도 없었다. 오로지 나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나무 한 그루만이 나지막한 지붕의 가옥들과 무논 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얼이 빠져 있던 것도 잠시, 주변의 초목이 수없이 살고 죽었을 자리에서 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홀로 버텨낸 나무의 존재에 문득 경외감이 느껴졌다. 재호 씨와 네 사람은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덩그러니 서 있는’ 나무를 보며 사람과 삶을 이야기했다.

나무 앞에 선 다섯 사람은 나이도, 출신도, 경력도 모두 다르지만 근 10년에 달하는 시간을 도박중독 회복자와 강원랜드 마음채움센터 전문위원으로서 함께한 사이다. 단도박을 시작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고향이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다 보니, 인근 지역에 남는 사람 들은 해마다 소중해진다. 매년 가족캠프 진행도 함께하다 보니 이제는 가족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무엇이 나를 중독으로 이끌었는지 확인하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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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호 씨는 무엇이 나를 중독으로 이끈 것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도박을 한 번 즐기고 말지만 누군가는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그 차이를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부터가 단도박의 시작이라고 했다. 재호 씨는 타인을 위해 나를 억누르며 살았던 것이 도박에 빠지게 된 계기일 거라고 설명했다. 좋은 친구, 친절한 직장 동료, 너그러운 이웃… 그렇게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살며 나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다 보니 지병도 얻게 됐다.

재호 씨가 처음 도박에 손을 댔을 시절에는 사행성 오락기를 길거리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지인을 기다리던 중 시간이 조금 남아서, 잠깐 시간이나 보낼까 하며 오락실에 들어서서 게임을 해본 것이 시작이었다. 오락기 앞에서만큼은 타인에 대한 시선도, 복잡한 생각도 모두 잊고 오로지 보상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이 너무나도 아늑해서 사설도박장 단속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로는 경찰의 눈을 피해 도박을 하곤 했다. 카지노로 향한 이유는 단순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떳떳하게 즐기고 싶어서였다.

삶의 변곡점을 만드는 것은 결국 또다시 ‘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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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의 일이었다. 밀려드는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이미 두 번의 출입정지 요청을 한 상태였던 재호 씨는 정말 이번을 마지막으로 카지노 방문을 그만두겠다며. 아내에게 돈을 받아 카지노로 향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홀린 듯이 머신 앞에 앉아 현란하게 움직이는 그림과 소리에 빠졌다.

그런데 그날따라 운수가 묘했다. 자그마치 다섯 시간을 머신 앞에 앉아 있었는데, 손에 쥔 돈은 카지노에 가지고 들어왔던 액수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따지도, 잃지도 않은 상태가 길어지자 과연 그도 조금 지치기 시작했다.

잠깐 숨을 돌릴 셈으로 다른 게임을 찾아 앉은 그때였다. 가까이서 “와!” 하는 탄성과 귀를 홀리는 머신의 징글 소리가 들렸다. 방금 자리를 떴던 바로 그 기계에서 잭팟이 터진 것이다. 그 순간 번개처럼 어떤 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나는 카지노와는 인연이 없는 거야’라고. 도박에 빠졌던 때만큼 도박에 ‘정이 떨어진’ 것도 몹시 우연하고, 또 갑작스러웠다.

중독을 이겨내는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위안’

지금은 마음채움센터에서 동료상담사로도 일하고 있는 재호 씨는 단도박을 ‘완치’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단도박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많은 수가 중독을 감기처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단도박을 한 지 햇수로 10년을 맞이한 그도 아직도 머신의 화려한 음향이 들릴 때는 도박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솟는다. 자신의 상태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기에, 그의 단도박도 꾸준히 이어질 수 있었다.

재호 씨는 행복이 이를테면 ‘마음의 무게’라고 한다. 내 마음이 가장 중요하게 무게를 싣는 데에 행복이 있다고 말이다. 누군가는 사회적 명예나 금전적 여유, 사회적 지위에서 마음의 행복을 찾겠지만, 그는 도박에 대한 유혹을 완전히 이겨냈노라고 자만하지 않고, 매일 충분히 경계하며 도박에서 하루 더 멀어지는 과정 자체를 행복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마음채움센터의 프로그램들은 무엇하나 도움 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 꼭 하나를 꼽으라면 단언컨대 ‘가족캠프’라고. “동질감도 들고, 일종의 자극이 되기도 하죠” 다른 도박중독 회복자들의 일상을 가까이 보는 것만으로도 단도박에 많은 도움이 된다며 회복자로서 가족캠프의 중요성을 몇 번 이나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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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결핍이 있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이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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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인 삶도 물론 멋지죠. 하지만 나는 그 이타심이 지나쳐서 정작 내게는 너무 소홀했고, 중독에까지 이르렀어요. 우리는 이기적일 필요도 있어요. 나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이기심을 가지는 것도 꽤 중요해요” 내년에는 마음채움센터를 통해 배운 제과기술을 더 많은 곳에서 펼쳐보는 것이 목표다. 잘 될지 어떨지 모르겠다며 너털 웃는 재호 씨의 목소리에는 그럼에도 감출 수 없는 의욕이 감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