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각이 아닌 통각에 해당되는 매운맛
한국인에게는 ‘매운맛’이라는 단어가 유독 친근하게 사용된다. ‘얼큰하다’, ‘시원하다’, ‘얼얼하다’, ‘개운하다’처럼 유독 매운맛을 표현하는 단어도 많다. 김치와 고추장으로 위세를 떨쳤던 매운맛은 그 모양새를 바꿔 우리의 생활 속에 파고들었다. 매운맛의 수준을 넘어 ‘화끈한’, ‘불맛의’, ‘극강의’ 등의 수식어를 붙인 매운맛 제품이 쏟아지고 있다.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는 의미의 ‘맵부심(매운맛 자부심)’을 이용한 마케팅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매운맛을 색다른 경험과 도전으로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각종 매체에서는 매운맛에 도전하는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MZ세대 사이에선 ‘혈중 마라 농도’, ‘마세권(마라 음식점이 있는 지역)’이란 신조어가 생길 만큼 맵고 자극적인 마라탕이 유행하기도 했다.
매운맛을 내는 성분은 크게 네 가지가 있다. 마늘과 양파에 들어있는 알리신(Allicin), 후추에 들어있는 피페린(Piperine), 겨자와 고추냉이에 들어있는 시니그린(Sinigrin), 고추에 들어 있는 캡사이신(Capsaicin)이 대표적이다. 특히 캡사이신은 교감신경을 활성화하면서 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의 분비를 촉진시켜 일시적으로 기분을 좋게 하고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사실 매운맛은 맛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맛, 쓴맛, 짠맛, 신맛, 감칠맛은 혀의 미뢰가 느끼는 반면, 매운맛은 혀의 통점을 자극하는 통각에 해당한다. 우리가 느끼는 매운맛은 고추 속 캡사이신이 삼차신경(Trigeminal nerve)을 자극하고, 삼차신경이 대뇌에 신호를 보내면 대뇌가 분석한 후 도출한 얼얼한 느낌과 통각의 혼합물이다. 대뇌가 이런 신호를 생성하는 것은 우리 구강 속에 캡사이신과 결합할 수 있는 수용체 단백질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매운 음식을 먹으면 땀이 나고 체온이 상승하며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데, 이는 에너지 소비가 증가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증상이 몸에 나타나면 뇌는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엔도르핀을 분비한다. 하지만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 우리 몸은 실제로 뜨거운 온도에 노출된 게 아니기 때문에 고통은 금방 사라지고 은근한 쾌감만 남게 된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유독 매운맛이 당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러한 반응이 반복되면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매운맛을 찾게 되고, 매운맛을 느끼지 못할 경우 오히려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바로 매운맛의 중독이다.
고통까지 수반하는 매운맛, 과하면 독이 된다
매운 음식을 과하게 섭취하면 건강을 해칠 수 있다. 위를 자극해 위벽이 얇아질 뿐만 아니라 위염이나 위궤양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인의 밥상에 오르는 음식이 대부분 맵고 짜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민 10명 가운데 1명은 위염을 앓고 있을 정도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20년에 위염과 십이지장염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환자는 모두 466만718명으로 집계됐다. 그중 여성 환자가 276만9,764명으로 남성 환자 189만954명보다 46% 가량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만성 위염의 대표적인 원인은 장기간 섭취한 짜고 달고 매운 자극적인 맛이다. 안면홍조 등의 피부질환이 있는 사람에게도 좋지 않다.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서 혈관이 확장돼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설사, 치질은 물론 배변의 고통까지 유발할 수 있다.
또한 캡사이신을 자주, 과다 섭취할 경우 혀의 통각이 둔해져 맛을 구분하기 힘들어지고 음식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 영양분을 고르게 섭취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캡사이신이 혈관을 확대하고 수면의 질을 떨어뜨려 육체적·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다시 쌓일 수도 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매운 음식이 생각나는 사람이라면 스트레스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다면 스트레스를 푸는 자신만의 다른 방법을 찾는 건 어떨까. 미각의 민감성을 높이는 것도 방법이다. 미각의 민감도가 떨어질수록 더 맵고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으면서 반복적으로 섭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과로와 스트레스를 줄일 필요가 있다. 과로를 하면 미각이 둔해지기 때문에 맛이나 자극에 대한 민감도가 낮아진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감정이 격해지면 교감신경이 활성화되고 침샘 기능이 저하되면서 미각이 떨어지므로 주의해야 한다.
사실 매운맛은 죄가 없다. 낮은 농도의 캡사이신은 식욕을 촉진하고, 장의 균형을 유지해 면역 시스템을 활발하게 하며, 뇌에서 도파민을 분비해 일시적인 스트레스 완화 효과를 준다. 하지만 매운 음식을 먹을 때 몸에서 열감이 느껴지거나 속이 쓰리다면 매운 음식 먹기를 멈추고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그래야 매운맛을 건강하게 오래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