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의 그때를 추억하며

아이가 막 걸음마 뗐을 무렵, 나들이 왔던 경복궁. 그리고 딱 십삼 년 만이다. 홍례문을 지나 근정전에 다다르니 우뚝 솟은 인왕산이 한눈 에 들어온다. 처마 끝에 넘실대는 구름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아내 를 남편은 아주 오랜만에 카메라에 담아본다. 이에 아내 지원 씨가 쑥 스러웠는지 남편에게 같이 찍자 손짓한다. 아내가 부르자 못 이기는 척 근정전 계단을 오르는 원석 씨. 부부는 이 시간이 꿈만 같다. 엄마 아빠 오붓하게 데이트하라며 일부러 자리를 피해줄 만큼 속 깊 은 아들이 중학생이 될 때까지 도박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지 원 씨. 아이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려 눈물이 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지원 씨는 아직도 자신이 용서되지 않는다. “도박에 빠져서 아이를 호텔에 방치한 채 살았던 지난 세월을 생각 하면 그저 죄스러울 따름이죠. 그런데도 아이는 제게 한 번도 원망하 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단도박을 하고 난 지금은 엄마와 함께 지내 는 시간이 많아진 것에 대해서 좋다고만 할 뿐입니다. 제게는 정말 과 분한 아이예요.”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부부가 단란하게 이곳에 소풍 왔을 그때만 해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간절히 기다린 아들이 건강히 태어나 주었 고, 남편의 사업도 잘되어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부족함이라곤 전혀 없는 삶이었다. 지원 씨는 그 모든 것을 다 잃은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때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를. 근정전을 지나 경회루에 이르자 지원 씨가 풍경에 이끌린 듯 자연스 레 연못가 벤치에 앉는다. 아내의 마음을 눈치챈 원석 씨가 따뜻한 커 피를 사 와 건넨다. 지원 씨는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연못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수면 위로 투명한 햇살이 별처럼 부서진다. 저 멀리 시원하 게 펼쳐진 북한산 능선도 보인다. 부부는 말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라기보다 하고 싶은 말은 많 은데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다. 이 복잡한 감정 이 버거워 한때는 전쟁처럼 싸우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젠 안다. 모든 것이 전부 내 잘못이었음을. 부부는 각자 반성을 한다. 

나를 잃었던 시간

약 십 년 전, 부부는 태백 근교로 가벼운 여행을 떠났다. 예정에는 없 었지만, 강원랜드 카지노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남편의 호기심 어린 제안에 무심코 따라갔던 것이 시초였다. 처음에는 재미 삼아 시작하 였지만, 계속해서 돈을 잃자 지원 씨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카지노에 집착했다. “남편은 달랐죠. 돈을 잃으니까 흥미를 잃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반대였습니다. 어떻게든 잃은 돈을 만회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벗어 날 수 없었죠.” 이후 지원 씨는 틈만 나면 카지노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게 십여 년 이 넘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전 재산을 잃었 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가족이나 지인들에게도 거짓말을 일삼았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는 그녀. 패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패란 것을 모르고 살다가 무너지니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 었어요.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그냥 인정하고 그쯤에서 포기하면 됐 을 것을 무모하게 달려들고, 또 달려들고…. 정말 수렁에 빠진 기분이 었습니다.” 도박중독자가 아니라는 착각에 빠져 도박을 끊을 생각도 하지 않았 던 그녀가 단도박을 결심한 까닭은 더는 도망칠 곳이 없다고 판단했 “도박에 빠져서 아이를 호텔에 방치한 채 살았던 지난 세월을 생각 하면 그저 죄스러울 따름이죠. 그런데도 아이는 제게 한 번도 원망하 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단도박을 하고 난 지금은 엄마와 함께 지내 는 시간이 많아진 것에 대해서 좋다고만 할 뿐입니다. 제게는 정말 과 분한 아이예요.”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부부가 단란하게 이곳에 소풍 왔을 그때만 해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간절히 기다린 아들이 건강히 태어나 주었 고, 남편의 사업도 잘되어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부족함이라곤 전혀 없는 삶이었다. 지원 씨는 그 모든 것을 다 잃은 지금에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때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를. 근정전을 지나 경회루에 이르자 지원 씨가 풍경에 이끌린 듯 자연스 레 연못가 벤치에 앉는다. 아내의 마음을 눈치챈 원석 씨가 따뜻한 커 피를 사 와 건넨다. 지원 씨는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연못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수면 위로 투명한 햇살이 별처럼 부서진다. 저 멀리 시원하 게 펼쳐진 북한산 능선도 보인다. 부부는 말이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라기보다 하고 싶은 말은 많 은데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다. 이 복잡한 감정 이 버거워 한때는 전쟁처럼 싸우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젠 안다. 모든 것이 전부 내 잘못이었음을. 부부는 각자 반성을 한다. 기 때문이다. 빚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불어났고, 이젠 돈을 빌릴 곳도 없었으며, 돌아갈 집마저 사라진 것. 지원 씨는 남편을 탓했다. 카지노에 발을 들인 것도, 도박중독자가 되도록 나를 방치한 것도, 전 부 당신이라면서 남편 원석 씨를 책망했었다. 원석 씨도 지원 씨가 밉긴 마찬가지였다. 도박빚을 갚아주면 언젠가 는 돌아오리라고 철석같이 믿은 것이 비난으로 되돌아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부부는 그렇게 서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로 헤어져 야 했다. “집도 절도 없는 상황이라 저는 아이와 함께 친정으로 들어가고 남편과 떨어져 살게 됐거든요. 카지노에 영구출입정지를 신청하고 친오빠의 도움을 받아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는 있었지만 모든 것이 막막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산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을 지 정말 모르겠더라고요. 좌절과 절망에 빠져서 매일매일 술만 마셨 어요.” 그러던 그녀가 KLACC의 문을 두드린 것은 오빠 덕이었다. 어쩌다가 도박에 빠졌느냐 질책하긴커녕 아무 말 없이 월셋집을 얻어주고 생 활비를 보내주는 오빠에게 고맙고 미안해서였다. 지원 씨는 KLACC 에서 상담과 치료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러자 기적처럼 새로운 인 생이 찾아왔다. 

이러한 평범한 대화가 그동안 얼마나 그리웠던가.
부부에게는 요즘 하루하루가 선물 같다.

되찾은 평범한 일상에 감사해

우선 과거에 대한 시각과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다. 모든 것을 남편 탓 으로만 치부했던 지난날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니 전부 저의 잘못이었더라고요.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 니 놀랍게도 아주 편해졌어요. 나를 도박중독으로 이끈 장본인이 다 름 아닌 나란 것을 인정하면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가눌 수가 없 을 것 같아 애꿎게도 남편만 탓했는데, 그게 저를 오랜 세월 도박중 독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든 원흉이었습니다. 어리석 었지요.” 새삼 남편에게 미안해진 지원 씨가 슬그머니 원석 씨의 손을 잡아본 다. 차마 표현하지 못했을 뿐 원석 씨도 아내에게 늘 미안했다. 그날 내가 카지노에 가자고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 같아서 아내 도박빚을 군말 없이 갚아주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 만 이제는 도박을 끊기로 결심해 준 아내가 마냥 고마울 뿐이다. KLACC 직업재활과정을 통해 직업상담사 자격을 취득하면서 중독전 문가로서의 새로운 삶도 꿈꾸게 됐다는 지원 씨는 최근에 사이버대학 교 사회복지학과에 편입, 한창 공부에 매진 중이다. 신무문을 나와 돌 담길을 걸으며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부부. 이러한 평범한 대화가 그 동안 얼마나 그리웠던가. 부부에게는 요즘 하루하루가 선물 같다.